김영랑 시모음

2020. 4. 3.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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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시모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오매 단풍 들것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디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강 물                                                

잠 자리 서뤄서 일어났소
꿈이 고웁지 못해 눈을 떳소
벼개에 차단히 눈물은 젖었는듸
흐르다못해 한방울 애끈히 고이었소
꿈에 본 강물이 몹시 보고 싶었소
무럭무럭 김 오르며 내리는 강물
언덕을 혼자서 지니노라니
물오리 갈매기도 끼륵끼륵
강물은 철 철 흘러가면서
아심찬이 그꿈도 떠실고 갔소
꿈이 아닌 생시 가진 설움도
작고 강물은 떠실고 갔소.   


5월 아침                                                

비 개인 5월 아침
혼란스런 꾀꼬리 소리
찬엄(燦嚴)한 햇살 퍼져 오릅내다
이슬비 새벽을 적시울 즈음
두견의 가슴 찢는 소리 피어린 흐느낌
한 그릇 옛날 향훈(香薰)이 어찌
이 맘 홍근 안 젖었으리오마는
이 아침 새 빛에 하늘대는 어린 속잎들
저리 부드러웁고
발목은 포실거리어
접힌 마음 구긴 생각 이제 다 어루만져졌나보오
꾀꼬리는 다시 창공을 흔드오
자랑찬 새 하늘을 사치스레 만드오
사향(麝香) 냄새도 잊어버렸대서야
불혹이 자랑이 아니 되오
아침 꾀꼬리에 안 불리는 혼이야
새벽 두견이 못 잡는 마음이야
한낮이 정밀하단들 또 무얼하오
저 꾀꼬리 무던히 소년인가 보오
새벽 두견이야 오-랜 중년이고
내사 불혹을 자랑턴 사람.   


언덕에 바로 누워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습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아슬하여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때라도 없더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이였데 감기였데.
 

지반추억(地畔追億)                               

깊은 겨울 햇빛이 따사한 날
큰 못가의 하마 잊었던 두던길을 사뿐
거닐어가다 무심코 주저앉다
구을다 남어 한 곳에 쏘복히 쌓인 낙엽
그 위에 주저앉다
살르 빠시식 어쩌면 내가 이리 짖궂은고
내 몸 푸를 내가 느끼거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앉어지다?
못물은 치위에도 달른다 얼지도 않는 날세
낙엽이 수없이 묻힌 검은 뻘 흙이랑 더러
들어나는 물부피도 많이 줄었다
흐르질 않더라도 가는 물결이 금 지거늘
이 못물 왜 이럴고 이게 바로 그 죽음의 물일가
그저 고요하다 뻘흙속엔 지렁이 하나도
꿈틀거리지않어? 뽀글하지도 않어 그저
고요하다 그 물 위에 떨어지는 마른 잎
하나도 없어?
햇빛이 따사롭기야 나는 서어하나마 인생을 느꼈는데.
여나문해? 그때는 봄날이러라 바로 이 못가이러라
그이와 단 둘이 흰 모시 진설 두르고 푸르른
이끼도 행여 밟을세라 돌 위에 앉고
부풀은 봄물결 위에 떠노는 백조를 희롱하여
아즉 청춘을 서로 좋아하였었거니
아! 나는 이지음 서어하나마 인생을
느끼는데.

 
발 짓

 

건아한 낮의 소란소리 풍겼는듸 금시 퇴락하는 양
묵은 벽지의 내음 그윽하고
저쯤에사 걸려 있을 희멀끔한 달
한자락 펴진 구름도 못 말어놓은 바람이어니
포근히 옮겨 딛는 밤의 검은 발짓만 고되인
넋을 짓밟누나
아! 몇날을 더 몇날을
뛰어본다리 날아본다리
허잔한 풍경을 안고 고요히 선다.


풀 위에 맺어지는 이슬


풀 위에 맺어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위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린다.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오월(五月)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진다.
바람은 넘실 천(千) 이랑 만(萬)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빛 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 버리련?

 

독(毒)을 차고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어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춘향(春香)                                              
 
큰 칼 쓰고 옥(獄)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 옛날 성학사(成學士) 박팽년(朴彭年)이
오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서름이 사무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南江)의 외론 혼(魂)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論介)!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貞節)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獄死)한단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卞學徒)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 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三更)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南原) 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두견(杜鵑)                                               
  
울어 피를 뱉고 뱉은 피 도로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에 지친 작은 새,
너는 너른 세상에 설움을 피로 새기러 오고,
네 눈물은 수천(數千) 세월을 끊임없이 흐려 놓았다.
여기는 먼 남(南)쪽 땅 너 쫓겨 숨음직한 외딴 곳,
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호젓한 이 새벽을
송기한 네 울음 천(千) 길 바다 밑 고기를 놀래이고,
하늘가 어린 별들 버르르 떨리겠구나.
몇 해라 이 삼경(三更)에 빙빙 도는 눈물을
씻지는 못하고 고인 그대로 흘리웠느니,
서럽고 외롭고 여윈 이 몸은
퍼붓는 네 술잔에 그만 지늘꼈느니,
무섬증 드는 이 새벽까지 울리는 저승의 노래.
저기 성(城) 밑을 돌아나가는 죽음의 자랑 찬 소리여,
달빛 오히려 마음 어둘 저 흰 등 흐느껴 가신다.
오래 시들어 파리한 마음마저 가고지워라.
비탄의 넋이 붉은 마음만 낱낱 시들피느니
짙은 붐 옥 속 춘향이 아니 죽었을라듸야
옛날 왕궁(王宮)을 나신 나이 어린 임금이
산골에 홀로 우시다 너를 따라 가시었느니
고금도(古今島) 마주 보이는 남쪽 바닷가 한 많은 귀향길
천리 망아지 얼렁 소리 쇤 듯 멈추고
선비 여윈 얼굴 푸른 물에 띄웠을 제
네 한된 울음 죽음을 호려 불렀으리라.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린 것을
이른 봄 수풀이 초록빛 들어 풀 내음새 그윽하고
가는 댓잎에 초승달 매달려 애틋한 밝은 어둠을
너 몹시 안타까워 포실거리며 훗훗 목메었느니
아니 울고는 하마 지고 없으리, 오! 불행의 넋이여,
우거진 진달래 와직 지우는 이 삼경의 네 울음
희미한 줄 산(山)이 살풋 물러서고
조그만 시골이 흥청 깨어진다.

 


북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진머리 휘몰아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마저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면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長短)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닥타 - 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 같이 익어 가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지


물소리                                                   

바람따라 가지오고 멀어지는 물소리
아주 바람같이 쉬는 적도 있었으면
흐름도 가득 찰랑 흐르다가
더러는 그림같이 머물렀다 흘러보지
밤도 산골 쓸쓸하이
이 한밤 쉬어가지
어느 뉘 꿈에 든 셈 소리 없든 못할소냐  
새벽 잠결에 언뜻 들리어
내 무건 머리 선뜻 씻기우느니
황금소반에 구슬이 굴렀다
오 그립고 향미론 소리야
물아 거기 좀 멈췄으라
나는 그윽히 저 창공의 銀河萬年을 헤아려보노니  



수풀 아래 작은 샘 

수풀 아래 작은 샘
언제나 흰구름 떠가는 높은 하늘만 내어다보는
수풀 속의 작은 샘
넓은 하늘의 수만 별을 그대로 총총 가슴에 박은 작은 샘
두레박을 쏟아져 동이 가를 깨지는 찬란한 떼별의 흩는 소리
얼켜져 잠긴 구름 손결이
온 별나라 휘흔들어버리어도 맑은 샘
해도 저물녁 그대 종종걸음 훤듯 다녀갈 뿐 샘은 외로워도
그밤 또 그대 날과 샘과 셋이 도른도른
무슨 그리 향그런 이야기 날을 세웠나
샘은 애끈한 젊은 꿈 이제도 그저 지녔으리
이밤 내 혼자 나려가볼꺼나 나려가볼꺼나


사랑은 하늘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맹세는 가볍기 흰구름쪽
그 구름 사라진다 서럽지는 않으나
그 하늘 큰 조화 못 믿지는 않으나 


숲향기  

숲향기 숨길을 가로막았소
발끝에 구슬이 깨이어지고
달따라 들길을 걸어다니다
하룻밤 여름을 세워버렸소

거문고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번 바뀌었는데
내 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 곳 몸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놓고 울들 못한다

 

미움이란 말

미움이란 말 속에
보기 싫은 아픔 미움이란 말 속에
하잔한 뉘침
그러나 그 말씀 씹히고 씹힐 때
한 꺼풀 넘치어 흐르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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