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시모음,겨울시,초겨울시 |
11월
늑골 뼈와 뼈 사이에서 나뭇잎 지는 소리 들린다
햇빛이 유리창을 잘라 거실 바닥에 내려놓은 정오
파닥거리는 심장 아래서 누군가 휘파람 불며 낙엽을 밟고 간다
늑골 뼈로 이루어진 가로수 사이 길
그 사람 뒷모습이 침묵 속에서 태어난 둥근 통증 같다
누군가 주먹을 내지른 듯 아픈 명치에서 파랗게 하늘이 흔들린다
(배한봉·시인, 1962~)
11월
한 그루의 나무에서
만 그루 잎이 살았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용하·시인, 1963~)
11월의 비가
길이
어둠을 점화한다
결코 닿을 수 없는 하늘을 향해
바다는 별을 쏘아 올리고
바람,
네가 피워대는 슬픔의 무량함으로
온 산이 머리끝까지
붉게 흔들린다
(도혜숙·시인, 1969~)
11월
너희들은 이제
서로 맛을 느끼지 못하겠구나.
11월,
햇빛과 나뭇잎이
꼭 같은 맛이 된
11월.
엄마, 잠깐 눈 좀 감아봐! 잠깐만.
잠깐, 잠깐, 사이를 두고
은행잎이 뛰어내린다.
11월의 가늘한
긴 햇살 위에.
(황인숙·시인, 1958~)
11월의 나무처럼
사랑이 너무 많아도
사랑이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
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에요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어놓은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
고운 새 한 마리 앉히고 싶어요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
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
갈 길을 가야겠어요
(이해인·수녀 시인, 1945~)
11월의 나무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황지우·시인, 1952~)
11월의 나무
가진 것 없지만
둥지 하나 품고
바람 앞에 홀로 서서
혹독한 추위가 엄습해도
이겨낼 수 있는
튼튼한 뿌리 있어
비워낸 시린 가지
천상 향해 높이 들고
흩어진 낙엽 위에
나이테를 키우는
11월의 나무
(김경숙·시인)
11월
무어라고 미처
이름 붙이기도 전에
종교의 계절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랑은 차라리
달디단 살과 즙의
가을 열매가 아니라
한 마디에 자지러지고 마는
단풍잎이었습니다
두 눈에는 강물이 길을 열고
영혼의 심지에도
촉수가 높아졌습니다
종교의 계절은 깊어만 갑니다
그대 나에게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유안진·시인, 1941-)
11월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제 있을 잎자리
빈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끼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택하는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힐 때
오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든다.
(오세영·시인, 1942~)
11月
추수 끝낸 들판
찬바람이 홰를 치고
바라보이는 먼 산들
채색옷 단장을 하고는
먼데서 오는 손님을 기다린다
잎을 지운 나무 위에
까치집만 덩그마니
11月 가로수 은행나무
줄을 서서 몇 뼘 남은 햇살에
마냥 졸고 있다
채마밭 식구들 실한 몸매를 자랑하며
초대받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데
길 옆 목장 젖소들 등마루에
남은 가을이 잠시 머문다.
(홍경임·시인, 경기도 안성 출생)
11월
아내의 손을 잡고 밤거리를 간다
불빛 사이로 잎이 진다
겨울로 가고 있는 은행나무
아내는 말이 없다
그 손금에서도 잎이 지고 있다
문을 닫지 말아야지
겨울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찬바람이 이는 마음의 문을 열어 놓는다
벌거벗은 나무가
나이테를 만들어 가고 있다
사람들이 가고 있다
문을 닫고 불을 끄고 이 밤
그들은 얼마나 긴 성을 쌓을까
구급차의 경적소리가 들린다
이 밤에 다 지려는가
몇 잎 남은 은행잎이
바람에 실려가다
아내와 나의 발등에 떨어진다
(정군수·시인, 1945~)
11월 안부
황금빛 은행잎이
거리를 뒤덮고
지난 추억도 갈피마다
켜켜이 내려앉아
지나는 이의 발길에
일없이 툭툭 채이는 걸
너도 보았거든
아무리 바쁘더라도
소식 넣어
맑은 이슬 한 잔 하자
더 추워지기 전에
김장 끝내고 나서
(최원정·시인,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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